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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니콜로 파가니니 이야기 / 허희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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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관리자
DATE
2013-09-08 16: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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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_바이올린의 신화

1840.5.27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 채 사망하다

이날 카파렐리 사제는 오래 전부터 품은 생각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겼다. 수개월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임종을 맞이한 어느 음악가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성직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의 굳은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어딘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 환자에 관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괴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악마가 들어 있소" - 임종 당시의 한 마디

이탈리아 제노바의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이탈리아 제노바의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한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그의 경이적인 연주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사제가 오늘 환자를 찾아온 주된 목적도 그것이었다. 곧 지옥으로 향할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영혼이 구제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후두 결핵을 앓고 있던 환자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음악가의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 때문이었을까? 사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환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한발 한발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그저 손짓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러서기는 커녕 한층 더 집요해지는 사제의 질문에 마침내 환자도 짜증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거의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다음, 음악가는 갑자기 바이올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했다.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존경받는 성직자의 증언이라서 그랬을까? 이 소문은 그간의 구구한 추측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졌으며, 아무런 검증이나 의심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그 음악가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던 것일까? 그런 소문이 근거 없음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임종의 자리에서까지 뜬소문에 대한 추궁을 받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너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말해주마 하는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퍼지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그에게는 아무 상관없었으리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바로 그날, 14세 된 아들이 혼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도시 니스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경의 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해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서나 반년이면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고, 파가니니는 열네 살인 1795년에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동안 궁정 악사로 일하던 파가니니는 1810년부터 본격적인 연주 여행에 나섰으며,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를 순회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진지한 음악이 아니라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였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의 모습(1832)

19세기 프랑스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의 모습(1832)

 

파가니니의 연주화를 알리는 포스터(1831).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광의도가니 였다. 관객들이 실신했고, 악마와 마녀가 춤을 춘다는 등 다양한입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파가니니의 연주화를 알리는 포스터(1831).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광의
도가니 였다. 관객들이 실신했고, 악마와 마녀가 춤을 춘다는 등 다양한
입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결국 사망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남국의 마법사의 연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해진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명민한 이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순간, 파가니니는 연주를 시작한다.” (베를린 공연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 중)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사후 3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지만, 죽음조차도 그에게 곧바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당일, 그러니까 1840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유명한 음악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그의 후원자인 디 체솔레 백작은 긴 여행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그 음악가의 시신을 방부 처리했다. 하지만 교회 측의 반대로 파가니니의 시신은 제노바로 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물러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의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갔지만,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다.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은 이미 50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대명사로 알려진 파가니니지만, 그에 관한 책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본격적인 단행본 전기는 베르너 풀트의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김지선 옮김, 시공사, 2003)가 유일무이하며, 위의 본문도 이 책의 내용을 크게 참고했다. 그 외에 파가니니의 생애를 소재로 한 프란츠 파르가의 소설이 <파가니니: 사랑과 선율의 분화산>(박민종 옮김, 을지출판사, 1979)과 <악마의 활: 소설 파가니니>(편집국 옮김, 세광음악출판사, 1994)로 번역되어 있다.

 

반면 파가니니에 관한 단편적인 글들은 음악 관련 교양서에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음악평론가 이덕희의 저서 가운데 <음악가의 연인들>(가람기획, 2002),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가람기획, 2005), <불멸의 명연주가들: 그들의 데뷔 시절>(가람기획, 2005) 등에는 각 주제별로 파가니니에 대한 내용들이 짤막하게나마 수록되어 있다.

 

파가니니를 평생 따라다닌 건강 문제는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 출신 저술가들이 쓴 음악가들의 질병 및 사망에 관한 책에도 파가니니에 관한 내용이 짧게나마 수록되어 있다. 이 분야의 고전에 해당하는 디터 케르너의 <위대한 음악가들의 삶과 죽음>(박혜일 옮김, 폴리포니, 2001)과 법의학자 문국진의 <모차르트의 귀>(음악세계, 2006)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파가니니라는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음악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필수일 것이다. 여러 대표작 가운데서도 <24개 카프리치오>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그리고 “라 캄파넬라”라는 별칭을 지닌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의 3악장 등이 특히 유명하다. 요즘은 인터넷에 여러 연주자의 동영상도 많이 있으니, 그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기만 하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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